불기재공 휘 양 행장사람이 옛을 법하지 않은 지가 오래된 것 같도다. 선비가 좀 스스로 좋아할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이 또한 서로 거느려서 부박(浮薄)하고 경솔한 구덩이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는데 오직 능히 돈후(敦厚)하고 주신(周信)하여 씻은 듯이 홀로 해탈(解脫)한 분을 내가 개성부(開城府)의 서쪽 호숫가 인노인에게서 보겠도다. 공은 임자년 二월초 二일에 나시었다. 겨우 나시매 어머니가 곧 운명하여 조모 김씨가 품에 안고 길러냈다. 겨우 七세에 또 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되어 가까이서 부양할 일가가 없었고 밖으로도 가까운 친척이 없게 되었으니 외롭고 고생됨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입학할 때가 되매 책상을 지고 정두곡(鄭杜谷)의 문하에 입학하였는데 정두곡이 공의 눈썹이 맑고 말씨가 분명하여 보통 아이와 다름을 보고 앞으로 크게 되리라 여겨서 적지 아니 사랑하였더니 장성함에 이르러서 조모 김씨와 계모 문씨 두 노인이 살아 계심에 전심하여 봉양하기를 언제나 온화한 안색이었고 모든 물건을 두루 갖춰서 편안케 해드렸으며 혼정신성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조모와 계모의 초상을 수년이내에 차례로 만났으되 빈소(殯所) 모시고 염(殮)하고 장례와 제사에 있어 한결같이 자양(紫陽) 주자와 가례(家禮)에 쫓아 모셨으며 몸에는 삼띠를 벗지 않고 음식은 맛있는 것을 먹지 않고 마시는 죽도 하루에 한 끼니만 들었다. 六년을 시묘살고 나니 나이가 三十이 넘었다. 초가 二칸을 서쪽 호수 위에 지으니 방이 한 칸에다 대청이 한 칸이었고 창문과 뜰이 모두 초라하였으되 언제나 책상이 정돈되었고 의관과 신발도 두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같이 공부한 처사(處士) 이공(李公)과 함께 결의형제 하고 주야로 서로 도학을 논하면서 세상에 발을 끊고 조용히 수양만을 즐기었다. 공께서는 일찍 부모를 잃어서 몸소 봉양치 못함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서 화려한 곳은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좋은 음식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고 三년상이 지났어도 六년간을 더 추모하면서 마음으로 복을 입었다. 아우와 누이를 우애함이 또한 더욱 돈독하여 아우가 기뻐하면 또한 좋아하였고 아우가 근심하면 또한 자기 걱정으로 여기니 온 집안이 화락하여 언제나 모범이 되었다. 살림을 내줄 때에 이르러서는 살림중에서 한 것을 토지에서 박토만은 자기가 갖고 좋은 것과 새 것은 모두 아우와 누이에게 주었으며 자기의 물건도 또한 별도로 더 주고 의복도 형제와 함께 입었으니 진실로 효도와 우애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공께서는 착한 일을 함에는 용기가 솟았고 이(利)와 명예는 피하길 겁이 많은 사람 같이 하였다. 곤궁하여도 가난으로써 개의치 않았고 남의 부귀를 보아도 조금도 부러워 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적하므로써 그 마음을 수양하고 자연 속에서 취미를 즐기었다. 사람ㄹ들이 혹 와서 앞일을 물어보면 웃으면서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을 가르켰으니 이것이 옛 성현이 천명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에 맞는 것이 아니냐, 그 몸을 항상 조심하여 일가 속에 갈거나 벗을 대하거나 마음에 있거나 하나도 남과 함께 말하지 않았다. 그 성품이 평화롭되 굳세고 그 행실이 후하되 모가 있고 그 말은 느리되 그 마음은 민첩하였으며 그 외양은 소박하되 속마음은 밝아서 언제나 가슴이 시원하고 넓었다. 이야기 함에 이르러서도 어렵게 하지 않으며 기쁨을 얕게 드러내지 않았으나 한 번 말이 나오면 남의 마음을 꿰뜷어 보는 듯하고 꾸밈이 없었다. 조용히 혼자 있어도 태만을 피우지 않았고 얕고 간사한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장기와 바둑도 좋아하지 않고 일을 당하고 물건을 대하매 절대로 추하거나 경솔히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몸을 수양함에는 마ᄄᆞᆼ히 속이지 않으므로써 먼저 해야 한다』고 하여 불기(不欺‥속이지 않음)의 두 글자로 자신의 별호를 지었다. 또 말하기를 『내가 항상 귀공(公)자로서 손바닥 가운데에 써서 마음을 잡고 일을 행함에 마ᄄᆞᆼ히 이 글자로서 관건을 삼는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 평화한 사람은 옳고 그름이 없나니 사람의 마음은 오직 의리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몸을 위한 뒤라야 가히 남에게 이를 수 있고 이치에 통달한 후라야 가히 일을 처리할 수 있나니 평상시 행활에 만약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으면 의(義)를 판단함에 이르러서도 옳고 그름을 가리기가 어렵게 된다』하였으니 공의 성품은 하늘에서 타고 난 것이라 특히 효도와 우애와 화목에만 그치지 아니하였다. 기상이 온화 단정 조심하여 한가함을 즐기고 용서와 사랑이 많았으며 일가의 가난하여 먹지 못하는 사람과 친구가 궁하여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은 반드시 옷과 먹을 것을 도와 주었고 내주다가 혹 넉넉지 못하게 되면 죽도 나누어 주고 헤어진 옷도 벗어 주기를 마지 않았다. 남이 혹 물건을 갖다 주더라도 의(義)가 아니면 반드시 사양하였고 남이 험담과 욕설로 꾸짖어도 겸손한 말로 대했으며 아들이나 조카들이 남에게 성내어 말하더라도 또한 못하게 하였으되 만일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또한 스스로 경계하여 책망을 듣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이르러서도 또한 시부모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잘 받들고 동서나 시누이를 공경하고 갈포나 길삼을 부지런히 하고 종들을 잘 돌보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ㅆ 견고하고 경계하였다. 또 아들과 조카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종과 주인의 의리를 알겠느냐?본래 의(義)로써 합함이니 그 의(義)란 나라가 있으매 임금과 신하의 존재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순순히 가르치고 일러서 부리되 혹독하게 다루거나 책찍질 하지 말 것이니 진(晉)나라 처사(處士) 도연명의 말이 있지 않느냐 저것들도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고 일렀다 한다. 남의 불행을 들으면 반드시 일부러 가서 부의(賻儀)를 내고 없는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급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궁함을 건져 주었고 선조를 받들음에도 한결 같이 정성과 공경으로 근본을 삼았다. 몸소 정성을 다하지 못하면 신명이 흠향하지 않는다하고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목욕하여 청결히 하고 깨끗이 쓸고 혼자 앉아서 오로지 조용히 지냈으며 삭망의 제사와 철따른 명절에도 천신(薦神)을 몸소 행하되 살아 계신 것 같이 하였으며 초상에는 반드시 그 슬픔을 극진히 하였고 먼 친척이나 아랫사람의 복(服) 입음도 꼭 지켰으며 모든 길흉에 돌보지 않음이 없었다. 슬프다! 공의 사람됨이 홀로 천품이 순수한 것만이 아니고 스스로 능히 도(道)에 한함이 모두 스승의 가르친 힘에서 나왔으나 몸소 수양한 마음속의 덕을 찾아서 조금이라도 의리와 판단에 따랐으니 진실로 묵은 선비나 잘못 배운 사람의 말할 때가 아니었으니 비록 옛적의 박식한 군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리오. 그러나 공께서 깊히 스스로 감추어서 남들이 알지를 못하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어찌 모르겠는가. 공께서 돌아가신 지가 五十三년이나 되는데 공의 증손이 공의 행적 약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조를 아는 분은 마땅히 어른밖에 없으니 다행히 사양치 말아달라』하였다. 내가 받아서 읽으매 모두 읽지 않았는데 눈물이 흘러서 저절로 슬퍼지도다. 이에 그 기록을 살펴보건대 공의 이름은 양(養)이요 자(字)는 호연(浩然)이시니 계통이 교동에게 나왔다. 신라 유례왕 때에 휘 서(瑞)께서 청백으로 아찬(阿餐)이 되고 교동백에 봉해졌으니 이 분이 인씨가 된 시조이시며, 고려 인종 때에 휘 의(毅)께서 있었는데 벼슬이 시어사(侍御史)로서 천재지변이 있음을 보시고 글을 올려 여러번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병을 핑계삼아 연안(延安) 별장에서 은퇴하여 사셨고 그의 아들 양(亮)은 병부시어사였으며 혹은 대신(大紳)은 고종 때 병마절도사로서 공훈이 있었고, 그의 아들 공수(公秀)는 대장군으로 원종 때 명신이었고 후손 후(候)는 충렬왕 때의 명신으로 우정승에 평양군(平陽君)이었고, 그의 아들 승단(承旦)은 금자광록연안부원군(金紫光祿延安府院君)이었다. 후손 당(璫)은 공민왕 때 명신으로 석성부원군이었고 원보(元寶)는 판밀직공이었다. 그 후에 대사헌(大司憲)이신 휘 황(璜)과 정랑 휘 철원(鐵元)과 학생 휘 수흥(綏興)이었으니 이 분들이 즉 공의 증조와 조부와 부친이시다. 생일과 돌아가신 날짜 묘소는 있었으니 이 분들이 즉 공의 증조와 조부와 부친이시다. 생일과 돌아가신 날짜 묘소는 모두 족보에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슬프도다! 공의 자질(資稟)이 족히 세상에 빛날만 하였으나 스스로 즐거이 시골에서 살아 세상에 쓰기를 구하지 않아서 이름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만 선행만이 장차 없어지려 하니 이 어찌 후배의 두려운 바요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당시에 약관으로서 여러번 선생의 문하에 나가서 가르침을 받아 무식을 면케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공께서 주신 것이로다. 내가 다행히 오래 살아서 나이가 八十에 이르매 이미 오래되었으나 마음에는 잊지를 않으매 오래 될수록 사모함은 더욱 돈독해진다 하겠다. 이에 공의 장손이 나를 늙고 혼미하다 이르지 않고 공의 실기(實記)를 써 줄 것을 부탁하니 그 뜻이 부럽고 그 정성이 심히 밝도다. 감히 사양치 못하고 이에 평소 보고 들은 것을 풀어서 기록하는 바이다. 上之九年甲子(一八六四年) 碧珍 李敬顯 謹狀